제주 번개라이딩(flashing mtb Riding Crew)

길이 아니라도 좋다, 산이라면 더욱 좋다

新탐라순력(Bike Tour JeJu)/Bike Tour JeJu-200

탐라 Bike Tour 04(와흘-대흘-와산-선흘리)+13

트멍 2021. 9. 12. 16:25

와흘-대흘-와산-선흘.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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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쨍한 여름이 지나고 심심찮게 가을 장마가 이어지던 중 잠시 장마 외출을 틈타 3개 흘(屹)마을, 와산리 Bike 순력(巡歷) 나섰습니다.

초가을 햇볕 등에 업고 흘(屹)마을 구석구석에 잔차 바퀴자국 남겼습니다. 이날은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약간 습하고 땀나는 라이딩이었습니다.

 

1. 와흘(臥屹)리 마을소개

와흘리는 제주시에서 약 11Km 떨어진 조천읍 중산간 마을로 1948년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었다가 1954년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와흘리는 마을을 감싸고 있은 산세가 사람이 편안하게 누운 모습과 같다 하여 예로부터 누울 와(臥)자와 산 우뚯솟을 흘(屹)을 써서 와흘리라 불렸다.

완만한 오름들 사이에 아득하게 자리 잡은 와흘리는 신비하고 든든한 한라산을 배경으로 제주의 넓은 앞바다를 넉넉하게 품고 있다.

와흘마을 설촌유래는 약 350여 년 전 팽나무 있는 곳에 사방지형을 둘러보니 아늑하고 사람이 살기 알맞은 곳이라 하여 사람들이 모여 정착하게 되면서 “한거리”마을이라 불리웠습니다.

제주도는 여러마을에 마을신 모시는 많은 당(堂)이 있지만 와흘 본향당(堂)은 송당 본향당(堂)과 함께 가장 규모가 큰 당(堂)중 하나에 속한다. 마을주민들의 무사안일과 농사 생산을 위한 여러 당굿의 행사가 행하여 지는 곳이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은 와흘 넓은못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주민들과 나그네들이 이 편안히 쉬어갈 수 는 장소이다. 넓은못은 투영되는 데칼코마니 영상이 아름답게 비치는 곳이다.
라이딩 중 만난 자그마한 연못, 하늘과 구름, 핑크색 수련을 담고 있는 예쁜 연못입니다.

 

2. 대흘(大屹)리 마을소개

 

대흘(大屹) 1

대흘리는 제주시내 동쪽으로 14km, 조천읍 소재지에서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산간마을로 대흘 1리, 2리로 나누어진 마을입니다.

대흘1리는 140여세대, 마을주민은 313여명이 생활하고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중산간 마을로 산세가 좋고 숲이 우거졌으며, 토질이 기름진 비교적 주민소득이 비교적 높은 마을입니다.

대흘1리의 설촌유래는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1730년경 유제륭(兪提隆)(1684-1773)씨에 의해 설촌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원래 이곳은 수풀이 우거져 있었으나 산돼지들이 흙을 파다(벗기다)보니 수풀은 없어지고 지금 마을안의 큰 연못이 되어 한흘(큰흘)이라고 불리었으나, 일제시대 한자표기로 大屹里(대흘리)로 표기되었다.

 

대흘 2

대흘2리는 제주시내에서 동쪽으로 14km 지점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130여세대에 360여명의 마을 주민이 감귤과 수농업과 콩작물 농사를 짓는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대흘 2리 마을 설촌유래는 1855년 제주한씨 한치민(韓致敏 )(1821∼1886)공에 의해 설촌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마을은 타 마을에 비해 해나 달이 떠오르는 것을 제일 늦게 보게 되는데 마치 이 마을 지경에 달이 숨어(제주방언으로 곱아)있다가 나오기 때문에 달이 숨은(곱은)마을이라하여 곱은달이(대흘2리속칭)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대흘리는 범죄없는 마을로 주민들 모두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 한가운데 도로에 우뚝솟은 보호수가 마을을 수호하고 주민들을 무탈하게 보호하였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다.

 

대흘리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세미오름, 주변 기슭으로 재미있는 mtb숲길이 숨어있다.

 

3. 와산(臥山)리 마을소개

와산리는 조천읍 소재지로부터 남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서  약144여 세대에 주민36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로 3개 흘(屹)마을 사이에 끼어 있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설촌시기는 약 350년전으로 최초 송씨가 입주하면서 설촌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설촌무렵에는 이곳 남쪽에 있는 당악(堂岳, 당오름)의 형태가 마치 백호(白虎)가 누워있는 형태와 같다고 하여 와호(臥虎)산으로 불리었으나 후에 와산(臥山)리로 개칭되었다.  

 

■ 와산리 종남밭(4,3 잃어버린 마을)

제주 4, 3의 아픔을 진한 초록의 이끼로 품고 있는 곳으로 제주를 방문하시면 이곳에 잠시 들러 제주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생생히 보여줄 만큼 집터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는 언론보도가 있는 곳입니다.(제주일보 2003년 4월 8일, 한라일보 2003년 8월 26일)

당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마솥, 주전자, 술병등의 흔적들
깨어진 옹기조각, 깨어진 부분에 세월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추측컨데 최근에 깨어진 듯...
확실하진 않으나 옛날 석유 등잔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변에 하염없이 자란 대나무와 사람이 살았었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이끼 자욱한 돌담
힘들었던 피빛의 아픔이 초록의 이끼로 지난 세월을 덮고 있습니다
쓰러진 삼나무 고목과 침입을 허용하지 않을 듯한 기세로 마을터 주변에 빽빽하게 둘러싼 대나무
세월을 덮고 있는 돗통시 초록의 이끼
마을 돌담터에도 진한 초록의 이끼와 고사리 등 양치식물이 잔뜩끼어 아픔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 듯.

 

■ SWISS VillAGE ■

와산리를 돌고 돌아 도착한 이국적 풍경의 Swiss Village, 근데 스위스를 다녀온 나로서는 주택분위기나 색상이 지극히 Swiss스럽지는 않았습니다.

 

 

4. 선흘(善屹)리 마을소개

선흘리는 제주시내 동쪽으로 26.5km지점에 위치한 중산간지역 3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마을로

설촌 연대는 뚜렷하게 고증할 만한 기록은 없으나 대략 650-700여년전 고려충렬왕 때 설촌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의 마을명은 1900년경 남단 이태성 선생이 착한 기상이 산과 같이 높게 뻗어 나아가라는 뜻에서 선흘이라 한데서 유래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도 지정문화재인 동백동산과 백서향, 변산일엽군락지가 유명합니다.

 

현재는 선흘1리, 2리로 행정구역이 분리되어 있고, 세계자연유산인 검은오름이 소재한 중산간의 평화로운 마을입니다.

선흘리 소재 마을 산책로 알림판과 우진제비 오름초입의 쭉 뻗은 삼나무길
선흘2리 소재 아름답고 소박한 선인분교, 운동장에 깔린 파란잔디는 학교를 꾸미기 위한 장식품이 아니길...
세계자연유산인 검은오름 소재마을 선화동
마을을 지나던 중 화산암으로 꾸며진 자그마한 교회정원, 이곳은 땅만 파면 저런 화산암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한적한 돌담길과 녹차밭을 지나며 바라본 검은오름 전경
검은오름 자락에 ORTEAS라는 개인농원이 꾸며 놓은 녹차밭 포토존에서 잠시 한 컷~~!!
선흘리에 소재한 동백동산, 아쉽게 잔차 출입금지입니다.
선흘마을에는 요즘보기 힘든 초등학교 분교가 여럿있습니다. 차츰차츰이라는 글귀가 마음에 끌립니다

■ 선흘리 낙선동 4,3성(城) 유적지 

 

○ 1948년 11월 20일 선흘리가 초토화작전으로 불타버리자 마을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의 자연동굴이나 들판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은신했던 굴이 잇따라 발각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미리 해변마을로 소개 내려간 주민이나 나중에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들 중에도 도피자가족 등의 갖은 이유로 희생을 당한다. 그런 세월을 딛고 살아남은 주민들이 1949년 봄이 되자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했다.  

 

이러한 돌성은 당시 소개된 후 재건하는 산간마을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을 했다. 즉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축성작업은 주민들을 동원해 이루어졌다. 성을 쌓는 작업은 주둔소를 쌓는 작업보다 오히려 더욱 힘든 일이었다. 마을을 돌아가면서 쌓는 성의 규모는 주둔소에 비해 훨씬 컸기 때문이다. 해안 마을로 피난 갔거나 감금됐던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축성 작업은 1949년 봄 한달 동안 계속됐다. 선흘 본동 출신으로 현재 낙선동에 살고 있는 고학봉(남, 03년 71세) 씨는 '낮엔 경찰의 감시 하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함덕으로 내려가 자고, 다시 아침이면 낙선동에 성을 쌓으러 오는 생활을 한 달 정도 했다.'고 말했다. 성을 쌓는데는 피난 내려간 선흘리민만 하는게 아니라 조천면 관내의 타 지역 주민들과 부녀자는 물론 국민학생들도 동원됐다. 당시 성을 쌓았던 주민들은 하나같이 '등짐을 져서 돌을 날랐기 때문에 어깨나 등이 다 벗겨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성의 규모는 대략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 폭 1m로 총 500여m의 직사각형 모형이었다. 고학봉 씨는 '성밖으로 너비 2m, 깊이 2m 정도의 도랑을 파서 가시덤불을 놓아 폭도의 침입을 막으려했다.'고 증언했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성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발발한 6․25 때 대부분 자원입대 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의 몫이었다. 그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파견소 주둔 경찰의 먹을거리를 마련하느라 고초를 겪었다. 또 노인들이 보초를 잘못섰다고 파견소 경찰한테 폭행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성을 쌓아 보초를 섰지만 1950년 가을까지 산사람들이 가끔 성 위로 나타나서 연설을 하고 새벽닭이 울 때가 되면 사라지곤 하다가 더러는 토벌대의 수류탄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이곳은 선흘리 본 마을과는 떨어진 곳이었다. 알선흘로 불리며 인근에 봉냉이동산, 돛바령 등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축성을 한 이곳에도 원래 마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해변과 가까운 곳에 우선 재건성을 쌓은 것이었다. 선흘리 주민들은 1956년 통행 제한이 풀리면서 비로소 원래 마을이 있었던 자리에 집을 지어 살았고, 일부는 그냥 성안에 정착해 오늘날의 낙선동을 이루고 있다. 

 

성을 쌓는데 필요한 돌은 대부분 인근 밭담이나 산담을 이용했으나 돌이 모자란 탓인지 심지어 돌절구나 주춧돌 등도 성을 쌓는데 이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성터를 돌다보면 성벽 중간에 안과 밖이 보이는 조그만 창을 볼 수 있다. 바로 밖으로 총구를 겨누었던 총구이다. 이 성터 위에 올라가면 마을 먼 곳까지 조망할 수 있다. 

 

낙선동성은 4․3 당시 축조된 성 가운데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일부는 허물어지고, 일부는 과수원의 경계표시를 위해 옮겨서 쌓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원형을 복원하는데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 2007년 제주도에 의해 복원되어 관리중에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